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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이미지의 기억

디자인의 생명력이란 무엇일까요? 한국적 이미지란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러한 생명력과 이미지를 찾는 것이 어떤 국수적 관점이라든가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만들어져 왔던 수많은 이미지들에 한국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하지만 한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싶다면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져 왔던 것들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문화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는 것, 그런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의 한 개체로서 나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한 문화가 남겨놓은 흔적, 그 안에 담겨진 시간과 공간의 수많은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을 벗어나, 인간 그 각각의 존재들이 모여 만들어 내고 있는 하나하나의 문화, 문명과 그 가치들, 그 존재하는 방식 자체들 까지도 받아들이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는... 그렇게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디자인은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즉감적(현재, 현시에 감각적으로 인지, 소통할 수 있는)으로 표출해내는 수단이겠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기 위해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나 자신만의 독특함,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 내가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기 위한 대상을 감각을 통해 구성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나 자신을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한국의 문화, 디자인도 다른 문화를 배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서 마주할 수 있게... 현실 속에 살아있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렇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 교육용 컨텐츠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제작했었는데요... 언제나 제가 찾고자 하던 이미지의 생명력이라든가 한국적인 이미지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만도 힘에 버겁더군요. (물론 제 경력이나 실력이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 그려진 일러스트를 보면서 속으로 ‘너, 누구야?’를 계속 되뇌어야 하는 것이 한 개인만의 문제였을까요?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내가 만드는 것이 현재의 생명력을 가지는, 한국적 이미지가 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한국인이 만든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현재의 이미지, 한국의 것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버거킹에 가서 코카콜라에 치킨와퍼 등을 즐겨먹는 제가 한국의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 한국에 존재하고 한국인이 즐기는 문화이기는 해도 한국적인 것들이라고 하기에는 뭔지 약간 미심쩍은 것들뿐입니다. 누군가는 소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하던데... 소비할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대로 소비해야 한다면 과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한 것일까요? 현재 한국의 문화가 가지는 태생적 한계, 외래문화의 강요된 토착화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겠죠. 아쉽기는 하지만 이것이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이고, 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문화의 주체에 대해서는 많은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이미지,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하고 정의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대부분은 그냥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구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미국과 일본의 문화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한국적 이미지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사실 실생활에서 그 생명력을 다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지를 제작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보통 출판 쪽에서 진행되는 일러스트 중에는 한국적인 냄새를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경향이 강한 분들이 계시고, 성공적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계신 것 같지만 인터넷 분야 등 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분야의 일러스트는 일본의 만화풍이라든지 외국의 일러스트 경향을 많이 답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롭게 무엇을 그리려 해도 시간 등에 쫓겨서 결국은 이것저것 베껴다 국적불명의 일러스트를 만들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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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관습이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디자인을 하기 위해배워왔던 모든 것들은 일본이나 미국식인데다가,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찾아보는 자료나 책들은 언제나 외국의 것들뿐입니다. 실생활에서 보이는 이미지들도 거의가 일본이나 미국식이죠. 결국 외국의 스타일을 적용하면 제작기간과 완성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안전한 작업이 가능해 집니다. 이미 외국의 이미지들이 삶의 일부분으로 정착한 상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한국적 이미지라는 것이 머리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막상 실제 작업에 맞추어 적용하려다 보면 여러 가지 현실의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미 적용되어지고 사용되어지던 이미지들, 결국 외국의 것들을 참고하게 됩니다. 호랑이 담배 먹고, 토끼가 뛰놀던 옛 시절에 대한 이미지들이나 산수화, 민화의 느낌 등 한국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IT분야에서 그대로 쓰려면 뭔가 어설프면서도 맞지 않고,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죠. (언젠가 수묵화를 3D로 구현한 동영상 작품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멋지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하지만, 일반 상업용으로 제작되어지는 일러스트에 그러한 이미지들을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해야 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작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서서 한국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 제작에 참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실험이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주변에서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작업을 위해 살펴보고 참고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외국의 것들과 이를 응용한 것들인 현실... 아마 한국적이라는 이미지를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 가기 보다는 우리의 관념 속에서 옛것을 보고 복원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죠. 현실에서 접하게 되는 많은 문화적 유산들(저에게는 디카나 핸드폰등도 문화적 유산이라고 생각되어지네요.) 속에서 느끼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한국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미지들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에게 한국적이었던 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 생각해낸 미래였을까?

한 문화의 이미지란 그 시대에 존재하는 고유한 개성의 표출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떠올리는 한국적 이미지라는 것이 어느 정도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나마도 현대의 생활은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기억마저도 서서히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죠.
현재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전 문화가 물려준 자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낸 이전 문화의 파편들, 남겨진 기억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그러한 기억들의 태반이 일본이나 미국에서 건너와 이 땅에 뿌리내린 타 문화의 기록, 기억들의 변형이라는 것이죠. 그나마 그러한 시절의 기억들조차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은 얼마 없고, 우리는 우리의 현재가 이식된 기억들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결국 현재의 우리에게 우리의 것, 한국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기억들, 한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던 기억조차 거의 소멸되어 버린 채, 이제는 한국인이고자 하는 의지만이 남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난 백년간의 기억들을 역사로서만 기록했을 뿐 우리의 현실에 남겨놓거나 보존한 것 같지는 않네요. 일러스트만 해도 국내에 이미지 스톡들이 만들어져 국내의 이미지들을 모으기 시작한 지가 몇 년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 국내의 이미지들 중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몇몇 작가들의 작품집이나 학술적 용도로 수집된 자료들이 전부였던 것 같네요. 그렇지만 이런 기억의 부재는 우리가 스스로를 기억하려고 노력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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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명전에 대한 복원운동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지키려는 분들이 노력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도 역사적이나 사회적으로 거창한 타이틀이 붙지 않는 이상, 경교장이나, 한국기장측의 선교교육원 등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자잘한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들은 방치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죠. 크게 보더라도 600년이 넘어가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나마 남아있는 문화유산들조차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얼마 없죠. 이런 분위기에서 소위 상업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자료로서 남겨진다? 이런 걸 언감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지난달에 잠시 샹하이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짬을 내서 시내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중국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동방명주와 황포강을 사이에 두고 동방명주를 마주보고 있는 외국조계지 시절의 건축물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스펙타클은 작년 김민수 교수님의 강의에서 다루어진 도시의 기억이라는 주제가 생각나게 하더군요. 물론 관광객들에게 보여지는 부분만의 화려함과 조화이기는 했지만 이 도시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현재의 이 도시가 무엇인지, 미래의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 시간의 공존 속에서 생동감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과거의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무시당하고 흔적만 약간 남겨진 채 부셔져 버린 옛 중앙청과 대비되어 그들의 식민지 시대 관청들은 문화유산으로서 조명을 받으며 서있었습니다. 샹하이의 인민들은 떳떳하게 자신들의 과거와 마주하고 있었던 거라고 하면 비약이 너무 심한 걸까?

물론 동방명주의 상징성과 현실에서 오는 부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동방명주에 들어가면서부터 맡게 되는 화공약품의 독특한 냄새... 아마 내장재나 페인트에서 나오는 냄새였겠죠. 그리고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Building furniture’를 포함한 인테리어 소품들과 전망대에서 보이는 지저분한 외부 도장의 난잡함 등... 게다가 ‘동방명주’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거의 모든 일행이 약간씩 눈이 따갑다거나 목이 막히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었습니다. 아주 경미한 증상들 이었지만, 서울이라는 공기오염에서도 세계적인 도시(서울에서 공기오염을 측정하는 기기들은 거의 공원 등의 녹지에 숨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정상적인 수치를 넘어버리곤 하죠.)에 사는 저희들이 약간의 이상을 느낄 정도였는데도 동방명주 내의 직원들과 점원들은 즐거운 듯이 떠들거나 피곤함에 지쳐 난간에 기대어 쉬는 등, 동방명주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더군요. 샹하이의 번영과 이를 상징하는 동방명주의 화려함에 한껏 자랑스러움을 품고서 그 현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생태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심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앞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현실이 어떻든지 간에 디자인은 꿈을 만들어 내고,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에 대한 기억조차도 조작하고 각인시킵니다. 기억은 과거에 존재했던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죠. 우리가 중앙청을 철거함으로서 식민의 아픔을 삭제하려 했듯이 샹하이는 조계지 시절의 건축물에 야경의 조명을 비춤으로써 식민의 굴욕을 번영의 기념물로 둔갑시킵니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걸까요? 자랑스런 동방명주나 그 옆의 높이 솟은 금무빌딩이 주는 이미지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일까? 디자인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삶을 존중하기 위한 것? 아니면 기만하기 위한 도구? 이미지를 조작하고 기억을 찍어내는 것일까요?

하지만 디자인이 그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고, 통제의 기제로 사용되더라도 인간은 디자인을 자신만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갑니다. 동방명주 내의 직원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디자인의 프로세스에 있어서 여러 가지 조작이 가해지기도 하고, 그 방향에 있어서 여러 가지 관점이 주장되겠지만 디자인 그 자체로서는 그 어떤 꿈을 보여주든지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디자인의 존재는 나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기억하라고 말이죠. 그것이 핸드폰이나 MP3로 변형되어 다가오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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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원래 그렇게 우리를 존중해주고 기억해 주겠지만, 디자인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억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국의 역사적 특징 속에서 부담없이 예전을 기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에 한국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표상으로서만이 박제되어 재생산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생명의 구석구석으로 미국과 일본의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와 삶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었던 것이겠죠.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이렇게... 따라오세요.’ 그리고 정작 열심히 따라온 지금 우리는 존중받아야할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것 같네요. 나는 나인데... 내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한국의 전통성을 그렇게 강조 했던 5.6공화국에게 필요했던 것이 한국의 살아있는 문화가 아니었기에 디자인은 정통과 전통의 기표만을 생산했고,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겠죠. 마치 80년대 유명한 교수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분의 한국적 일러스트에서 다루어졌던 한국적 주제들을 마주하면서도 한국적 감수성을 느낄 수 없었던 것처럼, 현실성과 생명력은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뭘 기억해야 될까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것? 우리에게 우리 고유의 이미지가 있었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이미지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이 다시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이미지를 그려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죠. 국외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들을 보고 비교해 보면 그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스타일이 느껴집니다. 우리스스로 ‘이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만의 감각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감각,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담겨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그 감각들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아직도 가능하겠죠. 대중문화의 현실에서 접하기 어려워 졌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러한 노력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죠. 제 개인적으로는 오윤 님의 투박한 칼질의 느낌이 참 좋던데... 이런 스타일의 일러스트들은 요즘도 간혹 보이더군요. 김수근 님이 건축물로 재현한 한국적인 것도 그렇고... 지금에 와서는 그 현재성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시대에 그런 작업을 가능케 했던 정신, 이 땅에서 내가 나이고자 노력했던 열정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우리의 기억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명확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고... 하지만 이런 현실에 대한 고민 속에서 우리 스스로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이미지, 한국적 이미지를 만들고 기록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꽤 괜찮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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