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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문화?

평소 이런 저런 모임들을 나가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저와 처음 만나는 분들은 제가 디자이너라고 밝히면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오는데, 보통은 우리나라 디자인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는가라는 질책성 강한 질문들이 대부분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일 수록,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기에 이젠 당황스럽다기보다 짜증스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기에 표정관리가 힘들어지기도 하죠.
디자인의 수준이 디자인계나 디자이너만의 문제일까?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손에서 만들어지기에,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서 그 디자인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역량을 언제나 백이십 퍼센트로 쥐어 짜내는 것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겠죠.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간에 디자인은 혼자만의 예술이 아니라, 여럿을 위한 산업입니다. 디자이너가 만들고 싶고 만들 수 있는 디자인이 있어도, 이 사회가 원하는 디자인이 전혀 다르다면?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제안할 뿐, 실제적인 결정은 디자인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와 그 디자인을 선택하는 소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단지 그들의 실제적인 결정, 즉 그들의 선택과 그 선택의 근원인 욕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디자인을 제안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능동적이어야 하지만, 제안되는 디자인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예술적 감각이나 사회적 사상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자본 혹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그런 현실은 생각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워낙 디자이너들이 크리에이티브를 강조하고 문화를 주장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인가?
지금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국외의 디자인 수준을 섭렵한 전문가들이죠. 그런데도, 국내 디자인의 수준이 낮은 이유가 단순히 디자이너의 수준이 낮아서라고 할 수 있을까? 유학 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도태되었기에 돌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국내의 디자이너들은 도제교육으로 찍어낸 직능인일 뿐일까? 그들에 의해 수많은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이제는 국내 출신 학생들 중에서도 국외의 유명 공모전에서 상을 휩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 현재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수많은 디자인들을 선택하고 상품으로서 생산을 결정한 사람들은 클라이언트의 몫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나 이해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되는 위치이죠.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자이너의 위치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제안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디자이너는 말을 통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죠.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 보통 사람과의 가벼운 논쟁도 힘든데 더욱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는 것 자체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이고... 결국 디자인을 모르는 클라이언트라고 해도 그 앞에서 디자이너는 오퍼레이터가 되기를 강요받기에,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의향대로 다시 만들어져 버리게 되죠. 그렇다고 클라이언트의 디자인 사고가 높아지길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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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시각이나 촉각 등의 감각적인 언어라고 할 때, 인간은 디자인을 통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자면, 디자이너만에 의해서 혹은 클라이언트에 의해서가 아닌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소비자들이 서로 만들어내는 여러 관계 속에서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렇기에 서로의 위치에 따라 서로의 관점에 따라 디자인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의견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각과 의견들이 일방적으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교류하고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지고 어느 누군가에 의해 비판되는 디자인이 아니라 서로간의 생각이 읽혀지고 인정된 상태에서 디자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디자인이 단지 디자이너만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다만 그런 관계 속에서 디자이너는 디자인의 입장에서 제안하고 방향을 보여주는 멘토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문화 자체가 탁석산님이 이야기하듯 ‘천민자본주의’로 밖에 파악되지 않는 현실에서 디자인의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도 좀 우습네요. 문화라는 본질이 없다시피 한 곳에서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소비자본주의도 문화로 생각해 주고 싶지만, 문화라기보다는 문화를 가장한 시스템의 영역에 머무를 뿐이죠. 그 속에서 진정한 문화가 향유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문화가 되지는 못합니다. DMB 방송이나 엠피쓰리의 음악을 들으며 길거리를 걸어가다 힙합을 추는 비보이들을 보며 문화를 즐긴다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즐거운 순간을 위해 DMB 폰이나 엠피쓰리를 구입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구입할 능력이 있어도 단지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 외에는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문화가 아닌 계급과 정치의 문제가 되어버리는데, 우리는 아직 그저 ‘그 물건을 사라, 그러면 너에게 문화가 주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는지.
하지만 그래서 더욱 디자인에 희망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문화를 감각으로서 파악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실재적인 문화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의 물질성 그 자체에 있으니까요. 아무리 머리 아프게 사회학이나 철학적으로 문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바뀌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 모든 것들이 깃들여진, 감각의 문화, 삶 그 자체죠.
디자인이란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다시 해석해서, 새로운 기호를 창조하는 행위’ 라고 하죠. 무언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도 아니고, 이미 주어져 있는 것 혹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도 아닌, 단지 있는 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것처럼 만드는 것이죠. 미켈란젤로처럼 대리석 덩어리만 보고 그 속에 숨겨진 무서운 사자나 아름다운 요정들을 정과 망치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을 가지고 정과 망치로 가장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리석의 형태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과 대리석의 상징이 달라집니다. 디자인에 있어서 변형의 주체는 바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고 그것이 문화니까요. 대리석이 거리에 놓여진 밴치라면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다 앉아 쉬거나 다른 사람과 잡담을 하는 장소로서, 대리석을 만남의 상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건물의 계단이라면 오르내릴 때의 숨막힘이나 높은 곳에 앉아있는 권력자를 향해 나아갈 때의 중압감으로 인해 권위의 상징이 될 수도 있죠. 아니면 침실에 놓여진 침대로서, 차가운 바닥... 치질방지를 위한 두꺼운 요가 필요하더라도 뜨거운 사랑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화이기에, 디자인을 문화로서 즐길 수 있도록... 특히 공공의 영역에 있어서 디자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제안하는 것은 결국 디자이너의 몫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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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양요나님의 이론서 한 권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책이 이론서라고 주장하셔도 이론서로 읽을 수 없음에, 그 가벼움에 오히려 즐겁게 읽었었는데, 그런 시도들이 디자인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디자인이 문화를 이야기해야한다는 말보다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부담 없이 전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우리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모를 때 그 무엇을 찾아 형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뻘쭘하지만 그 용기,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 가진 가능성이지 않을까요? 디자인이 미메시스가 아니기에, 모던의 시작에서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슬퍼했다지만, 오히려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던 디자인이 벤야민이 바라마지않던 숭고를 형성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물론 긍정적인 의미라고 하기에는 현재가 너무도 깨름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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