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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과 영원의 시간, 그리고 흔적으로서의 디자인

디자인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무테지우스 이후 디자인은 이러한 삶의 형태를 수치화 하고 측량하여 대량생산에 적합하게 만듦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문명의 혜택을 주려는 시도였죠. 디자인은 삶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 인간의 손에서 기계로 넘어가는 시기에 탄생한 것이었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르 꼬르뷔제가 추구한 모듈은 인간까지도 수치화 하고 공학적으로 분석하여 대량생산에 적합하게 적응시키려는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적인 예측과 모듈을 사용한 인체공학은 언제나 실패해 왔죠. 인체공학적인 제품들이 선보여진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언제나 인체에 보다 더 적합한 형태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인체에 대한 연구가 완결되었다면 더 이상의 인체공학적인 진화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오늘도 인체공학은 어제의 실패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죠. 움직임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은 운동, 즉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 그러나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에 무엇인가 끝나지 않았다는, 완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만큼 불완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모듈을 통한 수량적 분석과 예측은 인간을 연구하기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인간이란 결코 수학적 엄밀함이나 논리적 이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눌하고 모호한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겠죠. 같은 자동차 기어도 각각의 사람이 지닌 버릇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조작됩니다. 누군가에겐 알맞은 자동차 시트도 어떤 사람에겐 여전히 불편하죠. 아주 가끔씩 아무도 타지 않는 차가 움직인다 싶어 자세히 보면 핸들 너머로 빼꼼히 보이는 아줌마의 날카로운 시선을 볼 때 느껴지는 괴리, 혹은 섬뜩함... 모든 사람에게 알맞은 제품이란 없습니다. 자동차 시트는 동일한 규격으로 생산되어 나오지만, 인간은 일률적으로 규정되어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전화기, 리모콘, 현재의 DMB폰에 이르기까지 소비자가 제품의 기능을 모두 숙지하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은 얼마나 될까요? 얼리어뎁터로 불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비자가 모두 얼리어뎁터는 아닙니다. 사실, 형태적으로, 양적으로 보여 지는 현대의 엄청난 발전은 디자이너에게 조차 따라가기 숨 가쁜 일들입니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설명서는 디자이너조차 알고서 만드는 것일까? 아님 개발실에서 건네준 내용을 보기 좋게 편집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무수히 많은 이유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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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전까지 장인에 의해서 생산되던 제품들은 한 사람이 하나의 완제품을 만들기에 제품 전반에 걸친 기술들을 모두 숙련해야만 했었죠. 그래서 장인이 있는 곳이 공방이었고 생산현장이었으며, 그가 떠나면 생산은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공업생산은 장인이라는 한 개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습니다. 장인의 기술과 삶은 따로 떨어질 수 없었기에 그날그날 장인의 몸 상태와 기분에 따라 제품의 품질도 천차만별이 되곤 했었죠. 물론 고객에게 제품을 보여줄 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제품을 보여주었겠지만,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를 깨듯 무수한 제품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라져 갔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에 의한 생산은 언제나 예측불허의 상황을 불러올 수 있었기에, 생산만을 생각하자면 상당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장인이 감기몸살로 몸져눕기만 해도 그날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장인은 예측불가능하고 모호하긴 해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죠. 그의 인격과 그의 기술은 구별되지 않는 하나였으니까요.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의 사회는 수를 기반으로 하는 이성과 분석을 통한 예측에 의해 관리되어 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 예를 들어 자동차 같은 것들은 조립하는 각 과정마다 각 과정에 대한 단순 기술만을 익힌 사람들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고, 단순 노동은 그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조립 과정에서 몇 사람이 떠나도 그 사람들을 대체할 노동력은 언제나 대기하고 있죠. 이젠 제품을 만드는데 있어 각 과정에 대한 기획과 단순기술자들을 효율적으로 학습시키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만으로도 안정적인 제품 생산이 가능합니다.
자본이 노동조합을 달가워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자본에게 있어 노동자들은 생산의 수단입니다. 생산의 도구가 노동조합을 통해 기업의 통제와 관리에서 벗어나 기업과 협상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기업에 있어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상되지 않는, 통제하기 힘든 변수이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죠.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성에게 있어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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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통제와 관리의 시스템은 현재 주어진 현실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분리·조직해서 관리해야 하고, 모든 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시간마저 분석하려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무작정 놔둔다면, 애써 파악해둔 재고는 시나브로 변질될 것이기에, 시간마저도 조각조각 나누어 분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변화한다는 것만 알뿐 통제하고 관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이성에 있어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고 멈추어진 순간으로 파악됩니다.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순간은 단지 필름에 고정되고 각각의 나누어진 순간은 일정한 속도 속에서 일정하게 돌아갑니다.
세계는 그렇게 순간으로 정지·고정되어 버리고,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처럼 조각나 자꾸만 과거로 하나 둘씩, 시간이라는 번호가 붙여져 저장됩니다. 어제까지 조용하던 공장에서 갑작스러운 스트라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고, 멀쩡한 빌딩이 무너지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유가와 주가의 0.1원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있고,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핑크빛 셔츠와 초미니스커트도 며칠 지나지 않아 구닥다리가 되어 언제일지 모르는 그 유행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장롱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흐름들, 그 순간들의 맥락과 분위기마저 분, 초, 시로 나누어져 기록됩니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번호가 붙여진, 분절되고 정지된 각각의 사건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조각 조각내어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일까? 뉴턴에 의하면 시간은 절대적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시간은 신의 영역이었고, 전 우주적인 차원의 변화와 상관없는 불변의 기준이었죠. 예전부터 시간은 신이 만들어 놓았다고 믿어지던 천체에 의해, 그 움직임을 따라 만들어졌으니까요. 인간은 지구의 자전과 달의 변화, 태양의 괘적을 사용하여 시간을 계측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지구,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계측이란 것, 수라는 것은 이미 있어왔던 것도, 자연에서 주어진 것도 아닌, 자연을 관찰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죠. 이런 시간을 목성이나 천왕성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진 시간은 우리 은하계만의 시간입니다.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를 단숨에 살필 수 있는 관측자가 있다면 수많은 은하계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에게는 은하가 어떤 것은 빠르게 어떤 것은 느리게 돌아가겠죠. 각각의 은하가 가진 속도는 달라도, 그에게는 모든 시간이 같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은하계에서 우리의 시간으로 우리보다 빠르거나 느린 속도의 은하를 본다면 그 시간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가진 과학이라는 수단은 전 우주적으로 보면 상대적인 것일 뿐이죠. 결국 아인슈타인 이후 시간은 불변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빛이 그 절대적인 기준의 빈자리를 메꾸었습니다. 관측자의 위치, 운동에 따라서 똑같은 사건도 각자에게는 다른 시간으로 받아들여지기에 그 모든 것에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상의 기준이 빛이었고, 빛을 기준으로 하면 시간과 공간은 그리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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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이지만, 인간에게 시간의 상대성이라는 것은 더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시간은 상당히 모호하죠.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분초나 시로서 일정한 속도로 똑딱거리며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대로 마음껏 늘어나기도 하고 빠르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경계근무를 서며 국방부시계는 돌아간다고 아무리 되내어도 나에게 그 시간은 멈추어져 있었고, 스타크래프트를 몇 시간 한다 해도 이제 겨우 이 삼십분 지난 듯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인간에게, 인간의 인식에 있어 시간은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어느새 어제가 되어버리고, 미래는 벌써 오늘이 되어 있지만, 사람은 그저 오늘 현재에 살아갑니다. 인간의 현재는 미래이기도 과거이기도 한 모호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아무리 시간을 규정하여 분석한다고 해도 현재는 살아가는 것일 뿐, 분석되지는 않습니다. 나의 생각 혹은 그 어떤 분석법, 방법론으로도, 현재를 분석하려는 순간 그 현재는 이미 과거의 순간들로서 분석되어 버립니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나의 주관, 나의 실존으로서 그 현재라는 순간을 겪지만, 어떤 특정한 순간을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인식에 의해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내가 겪고 있는 순간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어느 시간상의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분석, 이성이라는 관점으로는 현재는 과거나 현재 미래를 생각할 수 는 있어도 현재라는 순간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를 겪어내는 것은 자기 자신일 뿐, 과거와 미래는 이미 자신을 떠난 객관적인 사건들일 뿐이죠. 자연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근대철학처럼... 인간의 인식이 없다면 시간이라는 것, 운동, 변화는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안간을, 인간의 현재를 분석할 수 는 없습니다. 인간을 분석할 수 없는 이성은 히스테리를 부릴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현대의 사상들이 허무와 신비주의로(어쩌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빠져드는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그저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수량이나 시간에 의해 측정되기 힘든 모호한 존재입니다. 이성의 히스테리에 두려워 떨면서도,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그저 순간을 살아갑니다. 순간... 순간은 인간의 인식을 통해 인지되고 인간의 인식은 과거와 미래에 까지 걸쳐있기에 그 순간은 영원하다고도 볼 수 있죠. 인간에게 시간은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가능성과 과거의 필연성으로 분리되지만, 그 시간들은 따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서 존재하고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면서 사라집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은 소멸을 의미하고 있죠. 시간은 그렇게 소멸하지만, 인간은 순간과 영원에 걸쳐서 계속 살아남으려 노력합니다. 모호하지만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가지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고,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 인간의 디자인은 그 시간과 시간이 주는 소멸의 운명과 싸우며 미래를 살아가려 합니다. 변화와 소멸 속에서 인간은 지속성을, 영원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그 흔적들을 남기죠.
디자인은 그 모든 것들을 흔적으로 남기고, 남겨진 흔적으로서의 형태를 지닙니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인간과는 달리 만들어진 형태로서 점점 닳아 없어지거나 폐기처분되기도 하고, 수리되고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만들어진 형태는 형태가 만들어지던 순간들을 지닌 체 인간과 교감하며 마치 거울처럼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모호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그랬기에 보드리야르는 형태 그 자체에서,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형태를 통해, 자신의 지독한 허무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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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에게 직관을 요구하는 것은 시간의 계측과 같은 엄밀함만으로는 인간을, 문화를 알 수 없기 때문이겠죠. 디자인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소비자 조사를 통해 현재의 소비자 취향을 조사하는 것은 계측되고 분석될 수 있는 현재와 과거의 현상뿐이고, 그것마저도 우리가 알고 있고 알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수 도 있겠지만, 그 예측이 항상 들어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결코 완벽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인간의 미래가 가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의 직관, 예측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꿈이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겠죠. 그 꿈은 단지 꿈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습, 이미 만들어진 디자인이 보여주는 형태와 교감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의한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자본, 산업이 아닌 디자인된 형태와 교감하는 인간의 모습, 문화를 그 자체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모호하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만... 미래에 대한 현재의 가능성은 드러난 현상만이 아닌, 가능성이 가진 모호함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 까요? 그 가능성을 믿는 것... 우리처럼 그나마 오래된 문화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엎치락 뒤치락거리며 살아가는 속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왔던 그 모든 디자인·흔적들을 인정하고 나를 인정하는 것만이, 시간의 엄밀한듯한 계측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디자이너 그의 직감과 직관을 가능성을 찾는 것이, 우리 삶의 순간들을 영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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