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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올드보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데, 제가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떻게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렇게 내질러 버리는지... 이 글도 이미 몇 년 전에 올렸던 글인데 책으로 엮으면서 다시 수정을 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한 것입니다.

암튼 김상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지만, 그분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는 잡탕으로 엉켜있던 생각들을 변기 뚫듯이 한번에 뻥~ 하고 뚤어주었으니까요. 특히나 라캉에 대한 부분... 환상의 알고리즘은 보드리야르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께도 권해드리고 싶네요. 쉽진 않지만 구조주의나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난해한 책들을 읽다가 잠드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듯 합니다.

두 개의 올드보이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일본만화의 갈등구조나 플롯, 캐릭터의 성향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몇몇 작품들은 소재와 갈등구조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마저 비슷하기에 표절의혹에 휘말리기도 하죠. 제작자들이야 억울하겠지만 지금까지 표절을 해왔던 전적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들을 표절해왔던 만큼 우리의 문화도 그들과 비슷해져 버렸으니까요.
사실 한국의 문화컨텐츠 속에서 일본이 보이는 현실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입니다. 만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각종 규제와 검열에 시달려야 했던 어린이 만화잡지들은 그 당시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참 고리타분했습니다. 덕분에 비록 해적판이었지만 자유로움과 유머 그리고 진지함 등을 보여주던 일본만화의 신선함은 많은 아이들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불법으로 복제된 ‘드래곤 볼’이나 ‘닥터 슬럼프’ 등은 조악한 번역이라는 핸디캡 속에서도 당시의 아이들에게 일본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고, 아이들은 즐겁게 그들의 그림과 문법 그리고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당연하지만 이제 그 아이들은 이 나라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세대로 자라나 자연스럽게 배인 일본의 문화를 바탕으로 현재의 한국문화를 왕성하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슷해져 가도 한국과 일본의 생각과 감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일본의 문화가 많이 스며들어있긴 해도 한반도라는 땅은 우리에게 우리만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만듭니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막무가내로 베끼려 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만화를 리메이크한 한국의 영화 ‘올드보이’는 그런 예들 중의 하나입니다.(물론 ‘올드보이’는 정식으로 원작의 판권을 사서 제작되었기에 표절시비도 없었죠.) 박찬욱 감독은 원작 만화의 소재와 줄거리를 가지고 원작과는 전혀 다른 한국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오히려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만화에 녹아있던 그들만의 문화와 문제의식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해 원작보다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올드보이’를 보면서 어느 작품이 더 나은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의 주제, 같은 이야기라도 상황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올드보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전혀 다른 두 개의 작품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살펴보는 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개의 ‘올드보이’를 살펴보다보면 어떻게 일본의 원작이 한국적인 문화가 철철 넘치는 리메이크 작으로 변형될 수 있었는지, 그 변형을 가능케 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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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원작)와 영화(리메이크작)의 배경
원작 만화(작가: 츠치야 가론, 작화: 미네기시 노부아키)와 리메이크 영화는 기본 소재와 줄거리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이유도 모른 체 1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만두만 먹어야 했던 남자(원작에서는 고토, 영화에서는 오대수)가 풀려나면서 시작되죠. 주인공은 너무도 억울하기에 누가, 왜 자신을 가두었는지 알아내려 노력하게 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망가져 버린 이유, 현재의 모습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 즉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을 마주하며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를 찾아내야만 했던 겁니다. 주인공은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여인도 얻게 되고 자신을 감금했던 사람도 찾아내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감금했던 남자(원작에서는 카케누마, 영화에서는 이우진)는 오히려 주인공에게 자신이 주인공을 감금했던 이유를 찾아내라고 요구합니다. 현실의 높은 벽 때문에 주인공은 복수는커녕 자신을 감금했던 범인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은 자신이 감금당했던 이유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고생과 노력을 다 하게 되지만 주인공의 힘으로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감금했던 남자가 스스로 그 이유를 밝혀주게 됩니다. 학생시절 주인공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사건, 주인공의 아주 조그마한 실수가 범인의 증오를 사고 복수를 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범인이 죽은 후에서 주인공은 범인이 계획해둔 복수, 그가 남겨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알고 보니 주인공이 현재 사랑하고 있는 여인을 만난 것 자체가 주인공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범인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줄거리만 보면 원작과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참 암울하죠. 이전까지의 만화나 영화의 영웅들과는 다르게 주인공이 겪게 되는 운명과 결말은 꽤나 비참하게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을 감금했던 범인에게 끌려 다니다가 범인이 자살한 후에도 그의 덫에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고토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리고 오대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지워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친숙합니다. 이유도 모른 체 감금된 주인공들의 처지나 그들의 결말이 나지 않는 엔딩은 별 이유도 없이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현대인,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올드보이’의 만화나 영화 둘 다, 주인공을 보면 어떤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저게 내 모습이지’라는 자조 섞인 한 숨만 나오게 됩니다. 둘 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을 너무도 잔인하게,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니까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무력함은 바로 나 자신의 무력함이기도 합니다. 카케누마와 이우진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의 성공한 부류 혹은 가진 자들에게 고토와 오대수로 상징되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게임을 위해 움직여지는 단순한 놀이 패 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고토와 오대수처럼 언제나 사회 속에서 불안과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버블경제가 꺼진 9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들어진 원작이나 IMF이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모두 소외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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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올드보이’ -카케누마의 ‘자아’찾기
원작의 제목으로 사용된 ‘올드보이’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래된 친구를 의미한다는데, 고토와 카케누마의 관계를 보면 제목에서부터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학생시절 같은 반에 있긴 했지만, 운동 잘하고 성격 좋던 고토와 공부는 잘해도 소심했던 카케누마는 서로의 존재감도 느낄 필요가 없을 만큼 먼 사이... 이름뿐인 동창이었습니다. 그들의 미래엔 ‘올드보이’라는 이름만이 약속되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어느 날 음악시간, 노래도 잘 못 부르는 카케누마가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담아 ‘꽃동네’라는 노래를 부르고 고토가 카케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순간, 비록 고토는 몰랐지만 고토와 카케누마는 수없이 많은 의미를 지닌 ‘올드보이’가 되어버립니다.
단지 누군가 노래를 불렀고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 뿐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름답게 생각될 만한 추억, 일상에서는 그저 지나쳐 버리는 어린시절의 해프닝에 불과한 사건이었죠. 한국이라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명랑교육만화의 해피엔딩을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원작에선 이 상황을 조금 꼬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것도 상당히 쪼잔하면서도 뭔가 심오한 듯이 만들어 버립니다. 만화는 이렇게 물어보는 듯 합니다. ‘나’라는 자아, 나의 주체성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고토야 마음 편하게 카케누마의 고독에 감동했겠지만, 카케누마는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는 겁니다.
카케누마는 키 작은데다가 얼굴 좀 못 생기고 음침한 성격에 소심한 것만 빼곤 꽤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성적만 놓고 보자면 모범생이었던 거죠. 하지만 ‘키 작은데다가 얼굴 좀 못 생기고 음침한 성격에 소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위에 친구가 없었던 겁니다. 반면에 고토는 그다지 잘나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카케누마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고토의 일상이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바라던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심리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에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공부만 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공부 잘 한다는 혼자만의 우월감은 자기만족을 줄 수는 있어도 외로움을 달래 줄 수가 없으니... 카케누마로서는 고토가 어지간히 부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나에게 부러워하는 그 무엇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있어야 정상인데 그게 없다는 겁니다. 때문에 부러움은 현재의 내가 비정상이라는 의미가 되고, 결국 정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다시 되찾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부러움을 만드는 그 무엇은 원래부터 내게 있던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꼭 나한테 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비정상인 것은 정상이었던 내가 무엇인가를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비정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쉽게도 카케누마는 그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빠져있었습니다. 마치 나르시스처럼 연못에 비치는 허상, 그 어디에도 없는 환상에 빠져 그 환상을 잡으려 버둥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고토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카케누마의 무의식에서는 고토의 그 멋진 모습이 왠지 나의 원래 모습, 잠시 잃어버린 것이기에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내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청소년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착각 혹은 감정입니다. 아이는 누군가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고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순간, 카케누마는 더 이상 고토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게 됩니다. 솔직히 부러움에 휩싸인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에는 타인의 모습만 보이지,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무조건 눈에 보이는 타인의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 모습을 정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고토는 단순히 동일시하고 대리만족하는 대상이 아니라 카케누마가 바라는 카케누마, 카케누마의 환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고토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노래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멋진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면 그나마 낫겠는데,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카케누마는 원하지도 않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고토의 눈물을 통해서 보게 된 겁니다. 카케누마로서는 머리 좋은 것만 빼면 시체인 자신의 진짜 모습을 그것도 공부 잘하는 순으로 따지면 깔보기 딱 좋은, 그렇지만 자신이 가장 부러워하는 고토에게 들켜버린 셈입니다. 결국 카케누마는 깨닫게 됩니다.

‘나는 고토가 아니다’

자신은 고토를 바라보며 그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고토는 카케누마를 바라보며 너는 너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저 동일시와 대리만족의 대상으로 남아 있어주면 되는 고토가 카케누마를 바라보며 카케누마라는 존재를, 한 인간을 인정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인정을 받았으니 좋은 법도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토의 행복을 바라보며 그 행복을 부러워하던 카케누마는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행복한 고토의 이미지에 얽매여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지도 그 모습을 인정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던 겁니다. 그런데 고토의 눈물은 그게 너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도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물론 고토가 바라본 카케누마와 카케누마가 고토의 눈물에서 바라본 카케누마는 같은 카케누마가 아닙니다. 고토로서는 그저 진심으로 노래를 부르는 카케누마를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카케누마로서는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직시하게 됩니다. 고토의 눈물 덕분에 카케누마는 숨겨진 자신의 내면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겁니다.
이제 카케누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고토를 부러워하는 자신을 긍정할 것인가 아님 부정할 것인가? 아이로 남을 것인가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가? 카케누마가 고토를 동경하는 자신의 모습을 긍정한다면 그는 고토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나’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까지도 받아주길 바라며 그의 모습에 만족하면 됩니다. 마치 거울이론의 아이처럼 고토는 자신에게 부족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나’의 이미지로 남고, 나는 나를 잊은 채 지금처럼 대리만족을 느끼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고자 한다면, 나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면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하지 그 누군가를 의지하는 ‘내’가 되어선 안 됩니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내 눈에 보이는 이미지, 내 손에 만져지는 감촉을 나라고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물론 현재의 카케누마로서는 그냥 ‘나는 나, 너는 너야.’라며 이 감정을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작고 초라한 카케누마의 자아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거울 속의 ‘나’처럼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고토의 이미지, 손에 꼬옥 쥐고 싶은 내 모습인데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이미지에 얽매여 있는 카케누마는 그 이미지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현실에 화만 날 뿐입니다. 카케누마는 고토의 눈물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는 아이로 남지도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덕분에 그는 선택을 유보하며,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한 고토를 증오하게 됩니다.
카케누마에게 고토의 눈물은 아픔이자 두려움입니다. 고토의 눈물은 카케누마에게 왠지 초라한 자신의 모습... 마치 벌거벗은 듯한 수치심만을 안겨줍니다. 고토의 이미지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환상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을 뿐입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를 거부하고 부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왠지 모를 모멸감에 치가 떨립니다. ‘내’가 아닌 그는 이미 나의 적일뿐입니다. 그런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신은 싸우기도 전에 고토에게 패배한 셈이었던 겁니다. 이제 카케누마로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고토와 투쟁해 그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카케누마는 자아도 현실적인 힘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버블경제로 성공한 자산가가 되자 카케누마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나에게 힘이 있음을 확인하면 됩니다. 싸움을 걸어 고토를 패배시키고 절망에 빠트려 자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음을, 나에게 그런 힘이 있음을 확인하고 즐기고 안도하면 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싸워 어느 한 편이 죽어나가는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싸움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겼다는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이겼느냐가 중요한 싸움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승리자이며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싸움... 이 싸움은 상대방을 이길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지, 단순히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목적이나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싸움, 단지 이기는 것보다 이겨내는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는 싸움은 마치 게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뒷면
게임의 결과는 일상에서처럼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을 지키면서 얻어낸 결과, 승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명예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게임이란 게임의 규칙을 지키고 승리함으로써 명예를 얻어내는 과정입니다. 단지 이기기만 해서는 자신의 명예,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카케누마의 싸움은 고토를 죽이는 게 아니라, 절망에 빠뜨려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이 되었던 겁니다. 15년 동안의 감금은 단순히 고토를 괴롭히며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토의 자아가 붕괴되길 기다리며 흘러간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카케누마는 고토가 스스로 자신을 포기만 하면 몇 개월 안이라도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카케누마는 고토가 체념하고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기만 하면 마음껏 그를 비웃으며 세상에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카케누마로서는 오히려 고토가 적당한 시기에 망가져 버리길 원했습니다. 너무 빨리는 안 되지만 너무 오래 걸려도 안 되었죠. 자신의 약한 자아로는 자신이 먼저 지칠 수 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토는 견뎌냈고 카케누마는 자신이 예상한 한계를 넘어서며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는 고토를 보며 두려움만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카케누마는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토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처음의 게임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카케누마로서는 이제 다음 게임을 제시하게 됩니다.
카케누마는 고토를 풀어주고 자신을 찾아오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낸 것처럼, 고토에게 게임을 제안합니다. 기한을 정해 놓고 그 기한 내에 왜 자신이 고토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맞히면 자신이 죽고, 찾아내지 못하면 고토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어차피 카케누마에게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고토 정도는 아주 손쉽게 정리해 버릴 수 있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고토를 없애는 게 아니라 제시된 게임의 규칙을 통해 고토를 굴복시킬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수수께끼의 답을 찾기 힘들게 그러나 포기하지는 못할 정도의 난관들을 준비해 둡니다. 카케누마는 게임과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그 게임 속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세하며 고토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카케누마는 이미 자신의 자아가 고토라는 거울에 얽매여 있는 허상임을 무의식중에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고토를 부러워한 그 시점부터, 자신의 자아는 고토라는 환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런 환상이 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환상은 깨지지 않았죠. 덕분에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고토를 부러워하면서도 경제적인 성공에 기대어 고토를 얻어내려 했던 카케누마는 이미 그 무엇도 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고토의 이미지를 벗어나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했지만, 그는 오직 고토의 환상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려고만 했던 겁니다. 그리고 고토의 눈물에서 그런 자신을 보았을 때,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한 고토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 넘겨 버렸던 겁니다. 자신의 모습에 책임을 질 수 없었던 카케누마로서는 결코 고토라는 실체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게임의 패배자는 자신이 감금당한 이유를 끝내 찾아내지 못한 고토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케누마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던 겁니다. 게임의 창조자였던 그 자신이 이미 고토의 이미지에 자신을 잃어버린 빈껍데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나이고자 하는 의지마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카케누마는 아직 아이와 어른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 그러나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나’인 고토에게 질 수는 없었습니다. 빈껍데기에 불과하기에 승리할 수는 없지만 패배하기도 싫기에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 이후 몇 년이 지나면 고토의 아내가 자살을 하도록 최면을 걸어 놓습니다. 고토를 부러워하는 자신의 마음, 고토에게서 보았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인정하기보다는 끝까지 고토를 무너뜨려 자신을 찾고자 노력해야 했던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카케누마의 정체성이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찾을 수는 없어도 찾아야만 하는 내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그 자체로 카케누마가 누구였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올드보이’는 왠지 고토보다는 카케누마가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늘 여러 모험 속에서 시련을 겪으며 자신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원작에서는 조연인 카케누마만이 자신을 찾기 위해 고독하고 비열하게 투쟁할 뿐이었으니까요.

(나머지는 담 달에 올리겠습니다. 너무 많아서 나누어서 올리는게 좋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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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호이징거는 '호모루덴스'에서 놀이란 신성한 규칙이며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실재생활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의미한 활동,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활동인 놀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겁니다. 사실 놀이에는 실제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현실과 달리 놀이는 의식주의 확보와 같은 실제적인 결과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놀이를 한다 해도 실제생활은 달라지지 않습니다.(현재와 같은 시뮬라시옹, 가상세계에서는 이런저런 스포츠나 컴퓨터게임의 선수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호이징거가 살던 백년전만해도 게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선수란 거의 없었죠.)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놀이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뿐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놀이... 그렇기에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실의 목적이 없기에 의미를 알 수 없고, 의미를 알 수 없기에 신비스럽게 느껴집니다. 놀이는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이라는 점에서,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질서와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나 제의와 마찬가지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호이징거는 이런 놀이의 특성이 문명을 만들어 왔다고 봅니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질서와 규칙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능력으로 거칠고 무질서한 세계를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세계로 만들어 왔다는 겁니다. 그는 법률의 정의나 전쟁의 파괴 그리고 예술의 아름다움과 같은 기준이 사실은 놀이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규칙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문명이라는 거창한 존재가 사실은 단순히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규칙에 의해 움직여지는 현상, 하찮은 놀이와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궁극적인 목적도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문명은 각각의 기준과 규칙을 통해 그 문명에 속해 있는 개인의 자아를 확립시켜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승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문화에 참여하고 그 문화, 놀이의 규칙을 지키게 됩니다. 놀이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놀이참가자는 놀이의 의미와 놀이에 참가한 자신의 의미를 함께 잃어버리고 맙니다. '목적은 없으나 의미 있는 행위'(알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는)인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놀이의 규칙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어떤 놀이(문명)에 속해 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와 같은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인증 받게 됩니다.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제시된 규칙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고, 그 경쟁 속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 명예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놀이나 놀이의 규칙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를 유지하며 그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놀이의 규칙을 지키고 승리함으로써 명예를 얻고 놀이의 규칙은 내 삶의 의미를 확인해 주고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현실... 어쩌면 인간이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 문명이 거꾸로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로저 카이와는 이러한 호이징거의 견해를 좀 더 수정하고 발전시킵니다. 그는 '놀이와 성스러움'에서 놀이의 규칙성(순수한 형식)과 그 놀이가 만들어내는 성스러움(순수한 내용)은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고, 일상생활을 기준으로 보면 ‘성스러움’과 ‘놀이의 규칙성’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호이징거의 생각들을 좀 더 구체화시키고 있는 거죠. 좀 더 나아가, '놀이와 인간'에서는 놀이를 '아곤(예측할 수 있는 경쟁)' '알레아(예측되지 않는 운)' '미미크리(가면놀이 같은 모방)' '일링크스(쾌감의 현기증)'로 분류하고 다시 그 상태를 '파이디아(무질서 상태)'와 '루루스(질서 상태)로 나눕니다. 놀이의 범주를 조금 더 세분화하면서 호이징거가 간과 했던 우연성과 감각을 놀이의 종류에 포함시킨 겁니다.

로저 카이와는 이러한 호이징거의 견해를 좀 더 수정하고 발전시킵니다. 그는 '놀이와 성스러움'에서 놀이의 규칙성(순수한 형식)과 그 놀이가 만들어내는 성스러움(순수한 내용)은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고, 일상생활을 기준으로 보면 ‘성스러움’과 ‘놀이의 규칙성’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호이징거의 생각들을 좀 더 구체화시키고 있는 거죠. 좀 더 나아가, '놀이와 인간'에서는 놀이를 '아곤(예측할 수 있는 경쟁)' '알레아(예측되지 않는 운)' '미미크리(가면놀이 같은 모방)' '일링크스(쾌감의 현기증)'로 분류하고 다시 그 상태를 '파이디아(무질서 상태)'와 '루루스(질서 상태)로 나눕니다. 놀이의 범주를 조금 더 세분화하면서 호이징거가 간과 했던 우연성과 감각을 놀이의 종류에 포함시킨 겁니다.
또한 놀이의 의미, 놀이참가자가 놀이를 통해 명예를 얻는 과정을 원시부족의 예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원시부족의 축제는 집단의 공공생활을 유지하는 제도입니다. 부족민들은 축제의 제의를 통해 부족을 이끌어가는 전사와 그들에게 보호받는 여자와 아이들의 관계, 부족의 사회적 구성과 위치를 재확인합니다. 이때 제의를 진행하는 전사는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리고 가면의 특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 힘에 동화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함으로써 부족이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된 이유, 전사가 전사이고 여자가 여자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공포와 신성함을 겸비한 신의 계시이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 전사는 부족의 근원이자 기준이 되어 자신들의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때문에 부족민은 대부분 가면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만 그가 가면을 쓴 순간, 그 누구도 그 가면을 쓴 사람이 자신이 아는 그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축제라는 놀이와 가면이라는 놀이의 도구가 부족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가면은 축제라는 놀이의 도구이자 규칙으로서, 가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와 모르는 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데, 가면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자격은 부족의 전사뿐입니다. 때문에 어느 정도 자란 남자아이들은 성인식을 통해 전사들이 마련해 둔 시련을 겪고 이겨냄으로써 그 부족의 전사로서 받아들여지고 가면의 비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아이들이 성인식의 시련을 통과해 가면의 비밀을 얻어내면 그들은 같은 비밀을 공유한 전사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부족의 전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얻어낼 능력을 가졌음을 증명함으로써 부족의 자랑스러운 전사라는 명예를 얻어낸다는 점입니다.
이런 그의 범주는 호이징거의 근본적인 개념과 일맥상통합니다. 카이와도 놀이가 우월함의 증명이며, 즐거움은 힘을 겨루는데서 나온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위험과 긴장 속에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신의 존재 증명, 명예가 없다면 놀이도 없다는 거죠. 인간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놀이를 통해 놀이에 참가한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명예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호이징거와 카이와의 견해는 서로 일치합니다. 놀이의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놀이에 규칙이 제시되었다는 점,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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